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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경지의 세계>-12. 영화 ‘조커’ 감상법

기사승인 2019.11.05  14: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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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대학교 김왕석 전 교수>

 명화의 기준과 관람객의 숫자는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젠가 상영되었던 한국영화 가운데 ‘손님’ 같은 영화는 명화임에도 상영관을 찾은 관객의 숫자는 불과 몇 십만에 불과 했다. 명화의 기준을 잡는 것 자체가 간단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나름대로 간단하게 명화의 조건을 열거해 보면 첫째는 엔터테인먼트다. 영화는 곡절불문하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없는 영화는 목적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 격이다.

둘째는 독창성과 예술성이다. 우리의 머릿속은 과거의 기억들로 진부하기 때문에 새롭고 창의적인 내용이라야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는 공감확대 가능성이다. 좋은 시, 좋은 공연, 좋은 박물관들은 우리들의 한계감정을 뛰어넘게 해준다. 넓은 계층을 아우를 수 있는 영화가 중요한 명화의 조건이다.

명화를 명화답게 불꽃을 튀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영화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감상하느냐가 중요하다. 역시 첫 손가락은 감정의 스포이드 이다. 스폰지가 물기를 빨아 들이 듯 영화 전체 내용을 감성으로 받아들이면, 한편의 영화로 한 사람의 전체 인생을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다. 내 규범, 내 성격, 내 감정의 잣대가 중심이 되면 쉽게 무감동에 빠지게 된다.

영화감상법의 또 한가지 중요한 방법은 영화 또는 주인공의 배역과 일체감을 갖는 것이다. 주인공과 일체감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일체감 없이 영화를 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영화는 나의 평가나 분석대상이 되고, 나는 영화 평가자나 분석자가 된다. 일체감을 갖는 순간 주인공의 모험, 비참, 희생, 쾌락, 욕망은 바로 내가 겪는 실제가 된다. 일체감은 밋밋한 마음의 바다를 갑자기 격랑과 폭풍과 해일로 바꿔준다.

영화와 내 생각의 불일치는 이원론이고, 완전한 일치는 일원론이다. 이원론으로 보면 마음속 곳곳에서 갈등과 번뇌가 창궐한다. 일원론으로 보면 모든 사물과 영화가 내 감정과 일치 한다. 하찮은 것 같은 영화가 일원론으로 보면 공감이 치솟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앞의 명화의 조건과 명화 감상법을 놓고 영화 ‘조커’의 내용과 장면들을 좀 더 세세히 살펴보자. 한 마디로 조커는 사회적 약자다. 사생아이고, 폭력 속에서 버려진 아이로 자랐다. 어른이 되여서도 고담시의 뒷골목 광고판을 든 광대라는 삶으로 연장된다.

홀어머니와 생존의 팍팍함, 동료들의 모함과 직장에서 해고, 권력과 도시정책에서의 소외, 예산중단으로 정신과 의사의 면접치료와 약물지원 중단, 끝없는 부의 잉여물을 독식한 자본가들의 탐욕, 출세한 코미디언의 비아냥과 함정에 몰아넣는 출연교섭, 친자이면서 온갖 서류조작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는 아버지, 끝내 그런 아버지에 대한 무망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무지와 그것을 자각하는 조커의 절망과 분노...

부분 부분으로 볼 때, 조커의 행동은 분명 반사회적이며 불법에 가깝다. 정신병고가 깊고 아웃사이더 이다.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한번 조커와 우리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자.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가 처해온 사회적 생태와 환경은 어떠한가?

더 떨어질 곳이 없고, 더 기댈 곳이 없다. 소외 되고, 고독하고, 절망하는 조커의 내면세계는 스스로 폭력과 살인충동의 광기에 차츰 근접해 간다. 궁핍과 인간관계 단절은 나 자신과 우리의 사회적 성격을 닮아 가고 있다. 깊어가는 사회적 병고, 조현병, 각종 정신질환들의 중병들이 이미 우리들의 의식 속을 탐욕하고 있다.

영화가 최고로 치고 솟은 것은 조커의 광대분장과 웃음이다. 조커의 웃음은 피학적으로 형성된 심리적 상실감이요, 도피 메카니즘이다. 조커는 고통스러울 때 끝없이 웃는다. 인후가 타들어 간다. 애 간장이 끊긴다. 슬픔의 반어법이다. 광대의 분장과 미소는 이 시대 고통 받는 우리들의 속과 겉의 상징이다.

권력과 부유계급의 탐욕의 무한질주, 끝없이 지하 나락으로 떨어지는 무산계급. 그들 계급간의 투쟁과 잠재 분노의 면면을 이렇게 예술적으로 상징적으로 후련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영화 감상법에 따라 조커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추는 춤을 내가 직접 춤추는 것으로 가상해 보라. 섬뜩한 억압과 광란의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되겠는가? 아니면 어떤 사회적 속박의 굴레를 벗는 자유와 해방의 위한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최고의 명화 조커는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적 감상법이 꼭 필요한 영화라 생각된다.

구명석 기자 gms75@hanmail.net

<저작권자 © 용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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